부쩍 추워진 날씨와 함께 2023 국립오페라단의 마지막 정기공연이 시작됐다. 지난 번 '라 트라비아타'에 이어 마지막 공연인 '나부코' 또한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에서 진행됐다. 오페라 캐스터 10기를 시작하며 첫 정기공연이었던 맥베스를 본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마지막 공연이라니 아쉬움이 앞섰다. 하지만 덕분에 특별한 시간도 갖게 됐으니.. 첫공연 전날 다른 서포터즈분들과 함께 공연장을 방문해 백스테이지 투어와 제너럴 리허설을 관람했다.
앞선 두번의 정기공연을 진행한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과 이번 공연이 진행되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프로시니엄 극장으로 흔히 우리가 공연장을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액자형 공연장이다. 이런 액자형 공연장은 무대 위에 준비된 그림을 연출하며 물 속에서 헤엄치는 오리발과 같은 바쁜 백스테이지를 철저히 숨기는 극장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보니 백스테이지의 존재를 쉽게 잊으며 공연을 보게되고는 하는데, 이번 백스테이지 투어를 통해 비록 현장은 아니지만 그 바쁨을 예상해볼 수 있었다.
백스테이지 투어는 무대 하수(Stage Right)에서 출발해서 무대 뒷편을 지나 무대 상수(Stage Left)까지 둘러보며 진행됐다. 무대 뒷편에 서서 객석을 바라보니 마치 내가 오페라 가수가 된것 같은 기분...?!
무대 뒷편에서 올려다보니 무대 전환을 위해 준비 된 세트가 더욱 거대하고 잘 보여 새삼 그 규모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세트들은 보여지는 무대 밖, 위쪽에 매달려 있는데 백스테이지 투어를 가이드 해주신 오페라단 무대감독님에 따르면 보이는 무대의 높이가 10m, 보이지 않는 무대 위쪽 공간까지 더해 30m에 이른다고... 보이지 않는 공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빽빽이 준비되는지 실감할 수 있는 수치였다.
무대 장치뿐만이 아니라 무대 뒷편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우선 장면장면 출연하며 퀵체인지를 위해 백스테이지를 달리는 출연자와 어두운 무대에서 출연자와 다른 스텝이 다치지 않도록 움직일 때 길을 비춰주는 또 다른 스텝들, 무엇보다 새로웠던건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오프스테이지 오케스트라였다. 오페라를 보다보면 가끔 분명 오케스트라 피트는 앞에 위치해 있는데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전에는 단순히 음향효과를 주거나 크기의 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효과를 위해 무대 뒷편에 연주자들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오프스테이지 오케스트라라고 하는데,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지휘하는 지휘자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백스테이지에 송출하고 오프스테이지에서 부지휘자가 이를 보고 오프스테이지 오케스트라에 전달해 객석에 더욱 풍부한 음악을 전달하는 것이다. 무대의 전환이나 퀵체인지는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나 새롭게 알게된 오프스테이지 오케스트라의 존재는 나부코 공연을 보며 더욱 음악을 주의깊게 듣게 해준 새로운 발견이었다.
알찬 백스테이지 투어 후, 제너럴 리허설이 진행됐다.
제너럴 리허설은 공연 전에 진행하는 가장 마지막 리허설로 모든 것을 본 공연과 똑같이 진행하며 체크하는 최종의 최종의 최종 리허설이다. 보다 자세하게 체크하기 위해서인지 원래 객석 뒤에 존재하는 콘솔박스를 당겨온듯 객석 중간통로에 테이블을 마련해 살펴보는게 인상적이었다. 출연자들 분장을 비롯해 음악도 끊김 없이 진행되는 마지막 리허설이라 마치 본공연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음날 첫 공연을 관람할 예정이었고 당일 오전부터 움직여서 피곤했던 탓에 리허설을 다 보지는 못했고 1막 리허설 관람 후에 돌아갔는데, 리허설로 훔쳐본 1막은 다음날 공연의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국립오페라단의 2023 첫번째 정기공연이었던 맥베스 관람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정기공연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이번 나부코는 전날 리허설에 이어 첫공연을 관람하는 지라 더욱 새로운 기분이었다. 사실 조용히 지나갔지만 첫공연이라 그런지 로비에서 전날 백스테이지 투어 전 짧게 얘기를 나눴던 포다 연출님이 계신걸 봐서 반가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첫공연의 캐스트는 A팀으로 나부코역에 양준모 바리톤, 아비가일레역에 임세경 소프라노가 출연했는데 맥베스를 관람했을 때 맥베스와 레이디맥베스로 만났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이즈마엘레역의 정의근 테너도 맥베스로 만났었고 양송미 메조또한 관람한 캐스트는 아니지만 일 트로바토레에서 아주체나로 올해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했던 가수이기 때문에 새삼 올해 오페라 캐스터를 하며 내적 친밀감이 생긴 가수가 많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부코는 '1막-인터미션-2막-인터미션-3막, 4막' 구성으로 이루어져 인터미션마다 여유롭게 다음 장면의 리브레토를 꼼꼼히 체크할 수 있었다. 전날 연출님과의 대화에서 '오페라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말보다 추상적으로 전달하는 시같은 것이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가사의 의미보다 무대와 가수, 음악이 주는 감정을 느끼라는 팁을 전해들었기 때문에 공연에서는 최대한 자막이 아닌 무대를 집중해서 보려고 노력했다.
이번 프로던션의 나부코는 무대연출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빨간색과 흰색의 두가지 색감을 집중적으로 사용한 무대는 단순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강렬한 대비와 결과적으로 마지막 장의 나부코와 아비가일레의 변화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주었다. 자잘한 소품보다 거대한 무대장치와 사람을 통해 담백하지만 깔끔하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이미지가 너무나 인상적이라서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막 후반에 아비가일레와 나부코에 성전에 도착하고 유대인을 몰아넣는 장면과 그 안에서 자카리아의 요구와 반대로 페네나를 살리는 이즈마엘레와 페네나가 탈출하자 성전에 불을 지르는 장면은 불투명한 원통형태의 무대장치를 이용해 집단적 움직임과 이즈마엘레의 행동에 대한 내부의 거부반응, 그리고 붉은 영상을 통해 불타오르는 이미지의 형상화가 강렬한 마무리로 인터미션 동안 1막을 계속 떠올리게 했다.
2막은 색의 대비를 십분 활용한 무대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극중 아시리아인이 붉은색, 유대인이 흰색으로 대표될 대 2막 초반 분노한 아비가일레와 억압받는 유대인을 붉은 벽으로 둘러쌓인 공간에서 학살의 이미지로 보여준다면, 이후 자카리아가 아리아를 부르며 유대인을 다시 일으킬때 붉은 벽이 위로 사라지며 다시 흰 공간으로 변화하는 연출은 포다연출이 강조하는 영성과 이후 등장하는 3막 후반 노예들의 합창에서 드러나는 한서린 희망을 예견해주는 듯 했다. 2막의 초반이 강렬한 붉은 색감 이후 흰 빛으로 아름답게 다시 물드는 무대를 보여주었다면, 2막 후반은 권력의 충돌을 이 두 색감의 대비로 강인하고, 충격적이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끝에서 부터 중앙으로 붉은 옷과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대치되어 신이라 자칭하는 나부코를 들어올릴 때 이는 마치 인간이 신에게 닿음을 넘어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담았다는 바벨탑을 연상케 했다. 결국 떨어진 나부코가 쓰러진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때 왕홀을 잡아채 같은 이미지를 반복하는 아비가일레는 나부코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임을 예언케 하는 한편, 2막 초반부터 이어지는 분노와 의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나부코에서 가장 유명한 합창이자, 장엄하다고 할 노예들의 합창보다 더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2막 마지막, 아비가일레가 왕홀을 잡고 서로 다른 집단을 밟고 올라서는 그 마지막 장면이었다고 감히 말하고싶다.
고조되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할 3부는 3막과 4막을 이어서 보여주었는데, 나부코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리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있는 3막은 모두가 기다리던 장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 출연진이라고 할법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한 합창은 그 규모만으로도 통일된 희망, 가장 보편적인 희망이란 무엇일지 고민하게 하는 웅장함이었다. 이후 자카리아의 아리아로 이어지며 어떻게 이들의 슬프고 아름답게만 들리는 희망이 힘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듯 했고 이어지는 4막에서 나부코와 아비가일레의 변화는 욕망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씁쓸함을 공유했다.
억압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이번 오페라의 이야기는 가장 보편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성을 가지고 공감을 끌어냈다. 또한 이를 절제된 색감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연출은 공연 내내 기대감으로 가득차게 했지만 그렇기에 아쉬웠던 부분은 더 크게 다가오기도 했다.
우선 1막에서 해오름극장이 오페라전용극장이 아니라서인지 타악기 소리가 울려 겹쳐들리는 듯한 느낌이 초반 집중력을 앗아가 아쉬웠다. 이후 조절이 된 것인지, 또는 무대에 시선을 뺏겨 더 이상 관람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장의 아쉬움이 남았다.
두번째로 합창 장면의 배경이다. 앞서 보아왔던 절제된 색감의 강렬한 연출이나 시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으로서의 오페라를 기대감을 점점 쌓아가며 보고 있었는데 합창 장면에서 등장한 '한'의 글자는 한글을 너무나 잘아는 한국인인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와 큰 아쉬움을 남겼다. 한국의 그러한 정서를 가져오고자 한 의도는 인터뷰를 통해 미리 만났으나 원하던 자연스러운 감정의 공유가 과연 한국에서 한글로 전달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공연이 현재의 순간에 시간을 타고 흘러가는 예술인만큼 우연히 겹친 국제적 상황과 이 오페라가 배경으로 삼는 이야기에서 관객으로서 의도와 다르게 유추할 수 밖에 없는 메시지는 의도치 않는 비판점을 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겨두고 마지막 정기공연까지 올해 Viva Verdi, 2023 국립오페라단의 정기공연을 함께 하며 경험해본 오페라, 경험해보지 못한 오페라를 다양하게 만나며 보다 푹 빠져 오페라를 감상하고 즐기는 한해를 보낼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사람을 미련넘치게 하는데, 서포터즈로서, 오페라 캐스터로서 함께한 정기공연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보내게 되겠지만 내년 더 다양한 작품으로 국립오페라단의 공연과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VIVA VERDI, VIVA OP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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