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2일 네 번째 희곡열전 : 천승세 낭독전
19:00 극단 해동머리 <포대령>
20:30 극단 별무리 <감루연습>
연극을 좋아하고 인상적인 공연이나 좋아하는 작가의 희곡집을 사서 읽기도 하지만 최근의 극작가가 아니라면 한국 희곡에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시대상을 감안한다고 해도 차별적 단어와 묘사는 현대의 독자에게 잘 읽히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곡의 무대화는 의미가 있다. 연출의 의도와 배우의 연기, 이외의 무대요소가 만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그 희곡에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돋보기를 가져다 대주기 때문이다. 이번에 방문한 천승세 낭독전은 개인적으로 아주 오랜만에 보는 낭독공연인 동시에 평소라면 내가 절대 펴보지 않았을 전후문학을 무대를 통해 만나는 시간이었다.
<포대령>은 6.25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하는 전후 소설이다. 낭독공연으로 별다른 무대장치가 없는 만큼 무대에서는 현대어로 다듬어지지 않은 포대령의 단어와 말투를 통해 당시를 드러낸다. 포대령은 전쟁 당시 포병 대령으로 참여한 김달봉을 지칭하는 말로, 그는 전쟁 중 포병 연대장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자신의 아내가 있는 마을을 자기 손으로 섬멸한 적이 있다. 이후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군대 안의 세계에 갇혀있는데, 그를 우연히 만난 ’나‘는 그런 포대령과 함께 지내며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포대령은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개인적 자아와 공적인 자아의 충돌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의 사정을 알고 나면 전쟁이 끝났음에도 군대 세계를 고집하는 그의 현실도피를 극 중 ’나‘처럼 연민하게 된다. 사회 안에서 다양한 사람과 서로 다른 환경과 위치에서 관계를 맺는 우리는 그 관계마다 입장을 가지게 된다. 그 관계들은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 충돌은 개인을 모순의 중심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종종 이러한 도피자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도피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연민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듯 ’나‘ 또한 포대령의 고집에 여러 번 불만을 비춘다. 결국 포대령의 전사는 그 스스로 내면의 충돌을 이겨내지 못한 채 맞이한 전사(戰死)는 아닐까.
<감루연습>은 감루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서 시작한다.
’감루, 감격하여 눈물을 흘림‘
’나‘는 감루의 순간을 계속 기다리지만 ’나‘가 생각하는 감루의 순간에는 결국 실패한다. 그런 ’나‘가 눈물을 쏟는 건 길을 가다가 땅강아지를 보았을 때이다.
이성과 감성에서 우위는 무엇일까. 우리는 쉽게 감정에 등급을 매긴다. 이건 얼만큼 슬퍼할 일, 이건 이만큼 아파할 일. 이런 등급 매기기는 곧 감정을 드러내는 일 자체를 하찮게 만든다. 감성적인 것이 약한 것이 된다. 요즈음의 우리는 냉소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감성적인 말 한마디는 오글거리고, 언제나 감성을 앞세우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길 위에 죽은 어린아이를 보고 슬퍼하려던 찰나 ’나‘가 들은 행인의 말처럼 ’이건 그렇게 슬퍼할 일이 아니야‘라는 듯한 평가가 만연한 그런 순간들에 놓여있다. 그렇게 누르는 감정들은 빠져나갈 곳 없이 개인의 내면을 해치며 자신에 대한 연민조차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연민은 쉽게 흔들리는 연약함이 아니라 관계의 밑바탕이다. 연민의 감정으로부터 우리는 손을 내밀고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어쩌면 분출하지 못한 감정들이 단절의 시작은 아니었을까.
이번 천승세 낭독전의 두 작품은 모두 분출하지 못한 무언가로부터 도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의 죽음에 어디도 원망하지 못하고 그 상황에 자신을 가둬버린 <포대령>의 김달봉과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구구법을 외는 <감루연습>의 나의 모습은 50년 전에 만들어진 인물들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내면의 싸움은 개인적이지만 그들을 도피처로 몰아간 것은 사회의 문제이다. 현재의 우리는 어떤 문제로 감정을 분출하지 못한채 홀로 싸매고 도망치고 있을까. 이번 낭독전이 내게 던지는 질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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